90년대가 돌아온 이유: 진정성

수년 전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어디에서나 90년대 트렌드를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캣워크는 그런지 룩과 슬립 드레스로 가득하고 패션 잡지에는 소위 90년대에 옷 좀 입는다던 언니, 오빠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하이 웨이스트 팬츠, 비니, 초크, 크롭트 톱을 소개하는 기사로 넘쳐난다.

패션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 시네마, 음악에서도 90년대가 자리한다. Drenge와 DIIV 등 네오 너바나 그런지라고 불리는 장르의 록밴드 음악이 인기를 얻고 있고 90년대 TV 드라마 X파일의 새로운 시리즈가 작년에 부활하여 방영되었다. 이 밖에도 1994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추억의 파워레인저가 영화로 새롭게 제작되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90년대 아이콘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위노나 라이더가 넷플릭스에서 선보이는 sci-fi 공포 드라마 스트레인저 씽즈(Stranger Things)의 주연으로 돌아왔다.



이런 현상을 보고 있으면 ‘트렌드는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한때 쿨하다고 여겨지던 트렌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 취급을 받다가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수십 년 후에 그 유행은 다시 돌아와 새롭고 흥미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패션 트렌드 주기는 보통 20- 25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20년도 채 되기 전에 90년대에 유행하던 스타일들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이 사이클이 전보다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정확하게 어떤 옷을 90년대 스타일이라고 지칭하는 것일까? 90년대 브릿팝 그룹 Sleeper의 싱어 Louise Wener는 가디언(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확하게 말할 수 없어요. 60년대를 떠올리면 미니스커트, 70년대에는 플레어 팬츠, 80년대에는 숄더 패드로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90년대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거든요. 프렌즈의 레이첼부터 코트니 러브까지 말이죠.” 그녀의 말처럼 이전의 시대와 달리 90년대를 한 단어로 쉽게 요약하기 어렵다.

90년대에 여러 가지 룩이 공존했다는 건 캣워크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캘빈 클라인부터 그런지 스타일의 마크 제이콥스, 구조적인 패션을 보여준 티에리 뮈글러, 비비안 웨스트우드, 판타지적 로맨티시즘을 보여준 존 갈리아노와 알렉산더 맥퀸까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인 Lauren Cochrane은 바로 그 다양성 때문에 90년대가 지금 인기 있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우린 지금 수많은 옵션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다른 것과 믹스하는 방식으로 문화와 패션을 소비한다. 이런 방식에 익숙한 젊은 층에게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했던 90년대가 더 흥미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Cochrane는 말한다.

“요즘에는 노스탤지어가 섹스보다 더 잘 팔립니다.” 스타일리스트 Benjamin Kirchhoff가 데이즈드 디지털(Dazed Digital)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노스탤지어(nostalgia)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즉,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90년대의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뉴욕타임스 T 매거진의 알렉산더 퓨리는 ‘The Return of the 90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90년대 패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진정성’이라고 언급했다. 코린 데이와 데이비드 심스, 스티븐 마이젤, 유르겐 텔러 까지 9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 포토그래퍼들은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냈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미지에 열광했다.



80년대에는 린다 에반젤리스타와 신디 크로포드 같은 글래머러스한 슈퍼모델들이 패션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카메라를 향해 인위적인 포즈를 취했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토그래퍼들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며 프로페셔널한 스튜디오와 세트를 벗어나 삶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솔직한, 날것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사진을 찍는데 사용한 사진 촬영 기법이 바로 스냅샷이다. 스냅샷이 주는 감정적인 진정성과 공감력은 당시 패션 사진가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고 ‘Fashion as Photograph: Viewing and Reviewing Images of Fashion 책에 실린 에세이 ‘Fashioning Fiction in Photography Since 1990‘의 공동 저자 Susan Kismaric & Eva Respini는 말한다.

그들은 일부러 조명을 아마추어식으로 설정하고 구도를 루즈하게 잡았다. 사진의 구성이나 컬러보다는 모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스티븐 마이젤이나 유르겐 텔러의 사진 속의 모델들은 거의 포즈를 취하지 않거나 카메라를 보고 웃지 않는다.

이 밖에도 80년대에 팽배했던 브랜드 숭배와 하이엔드 패션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디자이너들이 9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마틴 마르지엘라와 헬무트 랭, 후세인 샬라얀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에 큰 가치를 두고 노출된 솔기, 주름, 합성 소재, 장식을 극도로 배제한 해체주의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렇게 90년대에는 가식적인 모습과 인위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진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모든 것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수많은 이미지와 아이디어에 파묻혀 피로감을 느끼고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헷갈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패션도 마찬가지이다. 매 시즌마다 달라지는 트렌드, 끊임없이 런칭되는 패션 브랜드와 초 단위로 버려지는 옷들. 상업적인 패션에 의문을 제기하고 옷 자체의 진정성에 집중하고자 하는 브랜드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수년 전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베트멍 (Vetements) 컬렉션을 설명할 때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자주 언급된다. 프랑스어로 ‘옷’을 뜻하는 베트멍은 트렌드보다는 진짜 옷의 사회학적인 의미에 집중한다. 패션 매거진 i-D와의 인터뷰에서 베트멍의 수장인 뎀나 즈바살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파리의 패션 하우스에 있는 클래식한 모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패션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우린 그저 주변에 있는 것들을 흡수할 뿐이에요. 우리에겐 패션은 일상입니다. 저는 슈퍼마켓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독특한 사람들을 관찰하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아이폰에 정리하곤 합니다.”

런던 패션 위크에서 90년대 스타일의 시보리 염색과 헤진 데님 스타일을 선보인 디자이너 Faustine Steinmetz은 “오늘날의 문화와 가치에 동의할 수 없어요. 저의 옷은 문화를 상징하고 여기에서 의미하는 옷(clothes)은 패션(fashion)과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요”라고 데이즈드 디지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클래식한 아이템을 재생산하는 콘셉트를 추구하는 그녀는 모든 옷을 수작업으로 제작한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장인정신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패션 트렌드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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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god, 90년대가 돌아오다니!’ 2013년, 한결같이 90년대 셀럽들의 룩을 오마주한 패션 잡지의 화보들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옷장 어딘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을 펑퍼짐한 하이웨이스트 팬츠와 플란넬 셔츠, 바머 재킷이 떠올랐다. 촌스러움의 극치였던 90년대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Welcome back 90s!’

90년대가 돌아온게 반가웠다. 그저 당시에 즐겼던 대중문화와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과 달리 90년대의 패션계는 실험적인 시도와 발상의 전환이 쏟아지던 시대였다. 가지런한 치아와 잇몸을 보이며 미소 짓던 슈퍼모델들의 자리를 송곳니와 안짱다리, 모델치고 작은 키를 가진 케이트 모스가 꿰찮던 때가 90년대였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 포토그래퍼들의 사진은 기존의 패션 이미지에 대한 반항이자 진정한 도전이었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Face 매거진의 에디터였던 Richard Benson은 이렇게 말한다. “90년대 영국은 불황을 겪고 있었어요. 즉, 일자리가 없었다는 의미에요. 코린 데이의 사진에 나오는 단칸 셋방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른다면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녀의 사진은 판타지로 가득했던 패션 매거진에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더했다.

잡을 수 없는 허상을 주입하려는 패션 브랜드들을 보는 게 지겨운 지금, 약간은 촌스럽고 키치하다 할지라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90년대가 돌아온 게 기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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