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비판적 방식’이 될 때

**2018년 4월에 열린 웨비나(Webinar)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한 포스트입니다. ‘It’s Not a Garden Table: Art and Design in Expanded Field’라는 책에서 Klaus Spechtenhauser가 쓴 ‘From discontent to complexity’ 에세이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내용 전개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임의로 추가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은 삭제하였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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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도입부는 컨템포러리 디자이너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오늘날, 기능을 강조한 디자인 또는 상업적으로 잘 팔리는 디자인을 만드는 데 한계를 느끼는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디자인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환경적, 미학적인 담화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정해진 규율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디자인 오브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글쓴이는 이와 같은 현상을 체코 큐비즘의 가구 디자인과 마르티노 갬퍼의 작품을 예시로 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1910년대 초, 프라하에서 활동하던 아티스트와 건축가들은 파격적인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들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한 분석적 큐비즘 (Analytical Cubism) 즉, 대상을 파편화시켜 표현한 큐비즘을 자신들의 작업에 적용했고 이는 체코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Factory in Horta de Ebbo by Pablo Picasso (왼쪽), Still-Life with a Pickled Herring by Emil Filla (오른쪽)

사실 체코 큐비즘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어요. 그 이유는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체코 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됩니다 (공산화 시작). 이를 계기로 체코 큐비즘에 대한 작품이나 사진들은 다른 나라에 전시되거나 출판물에 실리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에 와서야 체코 큐비즘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다시 빛을 발하고 있는데요. 체코 큐비즘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프라하만큼 큐비즘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당시 큐비즘 디자이너들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고 하네요. 그림뿐만 아니라 가구와 세라믹,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 연극까지 큐비즘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분야가 건축인데요. 당시에는 합리주의 건축 디자인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체코 건축가이자 이론가였던 Pavel Janák 는 합리주의 건축에 대해 이렇게 비판합니다. “물질주의적이고 예술적인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며 실용성과 구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건축은 기하학적이고 다이내믹한 조각물이어야 한다면서 재료와 구조는 부차적인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체코 큐비즘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또 다른 건축가 Josip Plečnik는 이렇게 말합니다.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죽어있는 물체에 크리에이티브한 에너지를 더하는 것이다.” 큐비스트 건축가들은 다이내믹한 형태를 녹아낸 건축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Apartment in Prague by Josef Chochol (왼쪽), House of the Black Madonna by Josef Gočár (오른쪽)

체코 큐비즘 건축가들은 ‘형태에 삶을 가져오자’라는 이 새로운 사조를 가구 디자인에도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디자인한 의자와 책상, 진열장들은 극적이고 조각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하는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불가능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는데요. 그들이 선보인 디자인은 당시 산업 사회에서 통용되던 생산 방식으로는 제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가구를 만들기 위해 속이 꽉 찬 부품이 아닌 속이 빈 프레임을 사용한다든지 매번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어요. 기존의 제조법으로 구현해내기 어려웠다는 말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조건, 즉 기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Chair by Pavel Janák(왼쪽), Vase by Vlastislav Hofman (오른쪽)

큐비스트들은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 대신 개별적으로 제작되는 작품을 가치있게 여겼습니다. 이런 제품들이야말로 쉽게 복제될 수 없는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1914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하면서 체코 큐비즘 디자인은 세계적인 이목을 받게 됩니다. 전시에 본 Peter Jessen은 ‘날카로운 윤곽과 대담한 각도로 표현된 표면과 볼륨이 아름답다’라고 했으며 아트 히스토리언 V.V. Stech은 ‘각각의 디자인 피스가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처럼 보인다’ 라는 긍정적인 평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어요. 체코 아방가르드 이론가 Karel Teige는 ‘그들의 디자인은 비현실적인 유미주의와 형식주의로 점철되어 있고 혼란스러운 형태로 가득하다… 램프는 제멋대로이고 캐비닛은 실용적이지 않으며 데스크는 사용할 수 없고 의자는 앉으면 넘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Furniture Design by Vlastislav Hof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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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큐비스트 활동이 있고 나서 약 100년 후, 마르티노 갬퍼라는 디자이너가 나타납니다. 갬퍼는 현재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인데요. 갬퍼의 디자인은 체코 큐비즘이 추구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다 덜 편파적이면서 편안한 접근 방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2006년, 갬퍼는 ‘100 Chairs in 100 Days’ 라는 프로젝트를 하게 됩니다. 친구 집과 길거리를 다니며 버려진 의자를 수집하고 분해합니다. 분해된 의자 부품들을 가지고 100일 동안 하루에 새로운 의자를 하나씩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죠. 그렇게 제작된 의자들은 런던에 있는 빈집에 전시되었습니다. 갬퍼가 작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실용성인데요. 갬퍼는 자신이 만든 의자가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전시에 온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100 Chairs in 100 Days

그가 디자인한 퍼니처들은 상업적인 디자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100 Chairs 프로젝트는 의자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기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즉, 현존하는 의자의 종류와 스타일, 구조적인 요소를 모두 섞음으로써 새롭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생산될 수 있는 잠재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한편, 100 Chairs 프로젝트의 작품들은 실제로 사용 가능한 입체적인 콜라주라고도 볼 수 있는데요. 그의 디자인은 사용자가 다양한 시각적 연상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콜라주된 의자를 보면서 그걸 원래 디자인했던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이 의자가 이전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어떤 재료와 제작 과정이 수반되었는지, 의자가 제작된 당시 문화적인 컨텍스트까지 연상이 가능합니다. 의자의 스타일과 기능만큼 의자 자체가 가진 스토리 또한 중요하다고 디자이너는 말합니다.

100 Chairs in 100 Days

100 Chairs 프로젝트에서 갬퍼는 디자인이 가진 사회적, 개인적, 지리적, 역사적인 컨택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무작위성과 즉흥성이 가진 크리에이티브한 잠재력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유연한 접근 방식을 지지합니다.

갬퍼가 2006년에 진행한 ‘Arnold Circus Project’는 사회학적인 컨텍스트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공 공간을 재건하는 사안과 관련이 있는데요. 런던 쇼디치에 위치한 Arnold Circus 라는 공간은 마약 거래가 벌어지고 아무도 가지 않는 위험한 곳이었어요. 갬퍼와 로컬 주민들은 Arnold Circus 에서 열릴 피크닉, 콘서트, 게임 등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게 됩니다. 이때 어떤 가구를 사용할지 고민하던 중, 갬퍼와 콜라보레이터들은 이케아 같은 대기업에서 생산되는 저렴하면서 내구성 없는 의자는 사용하지 말자고 합의하게 되죠.

Arnold Circus Project

대신에 갬퍼는 튼튼한 플라스틱 스툴을 제작하는 데 쓰일 몰드를 만듭니다. 몰드를 활용하여 다양한 컬러의 스툴을 생산했으며 스툴을 거꾸로 놓으면 쓰레기통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Arnold Circus 프로젝트에서도 디자이너는 제품이 직접적으로 필요하다는 점과 사람들이 실제로 제품을 사용한다는 점, 즉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200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DesignMiami에서 갬퍼는 새로운 퍼니처를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If Gio Only Knew!’ 인데요. 여기에 Gio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Gio Ponti를 가리킵니다. 갬퍼는 지오 폰티가 디자인한 호텔에서 실제로 사용된 가구들을 퍼포먼스에 사용했습니다. (지오 폰티는 당시 호텔 건축뿐만 아니라 인테리어에 사용될 재료까지 직접 선택했었다고 하네요.)

If Gio Only Knew

갬퍼는 ‘세컨드 핸드 오브제’라는 차원에서 오리지널 가구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주는 (가구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되는) 과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작 과정을 퍼포먼스로 보여주었는데 온전히 디자이너의 호기심과 즉흥성을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는 아무도 몰랐고 프로세스는 자유로웠죠. 퍼포먼스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은 다양했습니다. 어떤 것은 실용적이었고, 어떤 것은 우스꽝스러웠고 어떤 것은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2008년에 작업한 ‘Total Trattoria’ 프로젝트는 가구 디자인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사회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갤러리와 뮤지엄, 스튜디오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동료와 친구들을 위한 쿠킹 이벤트를 열었는데요. 디자이너는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가구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이때 제작된 가구 중 하나가 Total Trattoria Off-cut Table 인데요. 각기 다른 13개의 테이블을 말발굽 모양으로 붙여서 제작한 테이블입니다. 보다시피 일반 테이블 디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상당히 재미있는 형태의 퍼니처가 탄생했습니다.

Total Trattoria

이처럼 갬퍼의 작품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의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땐 약간 당황스러울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확인된 순간부터 그의 작품들은 친숙하게 여겨지고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갬퍼는  밀라노에서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로 일을 한 경력이 있습니다. 마켓 리서치를 바탕으로 정해진 소비자를 위해 제품을 디자인하는 행위가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는 디자이너로서 특정 상황과 경험,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작업하길 원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갬퍼의 작품들은 상업적인 인테리어 샵 보다 뮤지엄과 갤러리에서 더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갬퍼의 디자인을 예술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오픈 공간에서 인스톨레이션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오브제를 전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의미론적이면서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언뜻 예술작품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의 가구들은 실제로 사용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갬퍼가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일까요? 그는 우연성과 즉흥성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을 통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의 기능성과 형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흔히 ‘편안한 의자’ 라고 하면 다들 머릿속에 비슷한 디자인을 떠올릴 거에요. 하지만 갬퍼는 콜라주된 의자를 가지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편안한 의자를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하는가?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의자가 다른 사람들도 편안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디자인을 위해 편안함을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등등. 그는 기존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를 가져올 원동력으로써 디자인이 비판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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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큐비스트와 마르티노 갬퍼와 같은 컨템포러리 디자이너의 공통점은 실용적이면서 잘 팔리는 디자인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려는 의지입니다. 큐비스트와 갬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가구를 활용하여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오브제를 제작합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디자인 인더스트리에서 흔히 따라야 한다고 하는 규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디자인에서 일반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큐비스트들에게 실용성은 제품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소 중 하나였을 뿐,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디자이너의 임무는 인간이 만든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더 낫게 만드는 것이다.” (their task “as designers is to concern themselves with the manmade environment and make it better”)

오늘날 수많은 디자이너는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디자인 프로세스, 산업 제품의 생산 방식, 또는 디자인을 평가하는 기준들을 비판적 의식 없이 따르고 있지 않은가요? 더 나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을 되짚어 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갬퍼와 같은 디자이너는 디자인 오브제가 실용성과 상업적인 성공을 수반해야 한다는 걸 뛰어넘어 디자인 자체가 ‘비판적인 방식(critical praxis)’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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